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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프란츠 카프카 본문

Book Review

변신 - 프란츠 카프카

Jay, Lee 2023. 4. 7. 19:17
어느 아침, 그레고르 삼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변신, 프란츠 카프카, p.6)

 프랑스의 유명한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플로베르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한 문장을 다른 하나와 연결시켰을 뿐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에로스가 플로베르 소설의 본질인 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사람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태인. 즉 이중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프란츠 카프카는 이 에로스를 이용해 한 중산층 보험팔이 말단 직원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이 책에 단점이 있다면 조금 느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느리다기 보다는 정교함과 묘사가 너무도 많아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가득하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카프카는 한 물건이나 인물, 그리고 설정을 놓아도 많은 생각과 사고 후에 놓은 티가 날 정도로 치밀하게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 진, 그레고르 삼자의 한탄과 가족들의 행동과 대사와 같은 정밀한 요소들은 실존주의를 이루고 인간의 모습을 이룬다.

 

 이 걸작은 니체와 도스토옙스키의 주장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실존주의자”라 불리는 그는 모든 신을 부정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성함도 부정하였디. 이 생각은 안톤 체호프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같은 허무주의와 비슷한 맥을 따르나 그들은 인류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니체의 생각을 신봉하며, 그리고 신성한 존재로서의 신들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카프카는 그의 소설들에서 간단한 질문을 제시한다. 만일 모든 형태로의 신들이 죽고 신성하지 않다면 그들의 자리는 누가 채울 수 있을까? 그 어느 누군가가 그들의 부재를 채울 수 있는가?

그는 그의 동생이 마음에 지니고 있던 따뜻함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절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입맛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오래된 신문 위에 선택할 수 있도록 여러 메뉴를 가지고 왔다. 그곳에는 반쯤 썩은 야채들과 지금은 거의 굳은 하얀 소스로 뒤덮인, 어제 저녁에서 남은 뼈와 함께 조금의 건포도와 아몬드, 그레고르가 이틀 전 먹지 못 할 것이라 단정지은 치즈, 마른 빵 한 조각, 버터를 바른 소금 처리된 빵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그녀는 그릇 하나를 놓았고 (그 그릇은 아마 그레고르를 위하여만 쓰일 것이다) 그릇에 물을 부었다. 그녀는 빨리 방을 나갔고 심지어는 자물쇠의 열쇠를 돌리기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그레고르가 이제는 자신을 편안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변신, 프란츠 카프카, p.46)
부모님’, 그레고르의 동생이 대화를 시작하는 방식으로 책상을 치며 말헀다. ‘이제는 이러한 방법으로는 살 수 없어요. 이해하실 수 없으실 수 있지만, 저는 이해합니다. 저는 이제는 저 괴물 앞에서 제 오빠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고, 이제는 저희가 저것을 치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희는 인간의 선에서 할 수 있어서 할 만큼 했습니다. 저희는 저것을 돌보고 침착하게 기다려줬습니다. 저희를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변신, 프란츠 카프카, p.97)

 세상에서 신성함을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신성함의 제일 기본적인 모습은 책임감과 의무감이다. 만일 신성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 가질 감정을 완벽히 다스리는 사람일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방해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르의 가족은 그가 어떠한 계기로 그러한 식으로 변하게 되었는지 이해하지는 않은 채 이해하는 ‘척’을 한다. 원래부터 접촉이 없었던데다가 제일 많은 접촉을 가지고 있던 여동생마저 점차 그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행동은 아마 부도덕하며 신성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신성한 존재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신성함을 책임감으로 본다면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그들의 무관심에 책임을 완전히 지고 있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아마 신성함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닐까. 신성함이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절대적 지배자의 위치에서 우리를 권장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이 힘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좋던 나쁘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향은 그들 주위의 인물들에게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유발자는 책임을 지고 행동을 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기에 모든 행동은 신성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들은 실제 신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모양에 상관없이 신을 믿는다는 것에 비추어보자. 만약 인간이 신성했다면 종교는 존재할 이유도 목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신성하지 않은가?. 왜 인간을 추양하지 않는 것일까? 한 인간이 자신의 신성함에 실행한 한 행동은 다른 사람의 신성함을, 그들이 사는 방식과 같은 것들을 쓸모없게, 비활성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영혼의 신 성함은 다른 존재의 신성함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은 연결이 되어있고,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기에 침해가 일어난다. 나는 이것이 인간들이 신성한 존재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남의 신성함을 생각치 못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간들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수행하는 신성함을 띄는 행동들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욕구에 의해 가려지게 된다. 책 속에 있는 그레고르의 여동생이 그레고르가 다시 인간으로 변해 돈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개인적인 바램과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자 바로 천대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인간다움”, 즉 “무신성”의 존재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존재의 행동이 그 존재 자신에게 갈등과 혼란을 가지고 왔다-도덕과 부도덕함, 신성함과 욕구의 전쟁 말이다. 사람들에게 완전히 신성함, 즉 순도 100%의 신성함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은 없다. 그러한 행동들은 반드시 욕구라는 성격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있다. 지금 양국은 벌써 한 달간 전쟁을 진행해 온 상태다.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과 이스라엘의 방어 체계 “아이언 돔”간의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는 엄청난 양의 파괴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양국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갈등과 같은 것으로 한층 심화되었다. 가디언지에 이르면 이 의미 없는 술래잡기는 7월 7일 하마스가 2012년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미사일을 쏜 점을 시인하며 시작되 하마스의 게릴라 부대와 이스라엘의 미사일 보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공격 전술은 잔혹하였는데, 눈 주위 가려움증부터 인간 세포 조직 화상, 간, 심장, 그리고 콩팥 손상과 심지어는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백린탄을 사용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국가의 신성함, 자신의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했지만 그 결과는 팔레스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독이 되어 돌아왔다. 고통에 시달리며 죽은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반유대 시위는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인간들은 특이한 존재이다. 그들은 창조하며 소멸시키기도 한다. 바로 이 성격이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들에 대해 “불완전한 주인들”이다. 『변신』은 인간들을 엄청난 양의 묘사와 날렵한 분석으로 우리 현재의 모습 하나하나를 정확히 그려내었고 심지어는 우리가 발전할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등장인물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쪽은 “완전”한, 신성하며 올바른 인간을 본다. 다른 한 쪽에서는 우리는 욕심과 욕구로 충전받아 혼란을 일으키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두 성격의 교차와 조화가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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